런던 그래머(London Grammar)는 데뷔와 동시에 화제가 됐지만, 개인적으로 <If You Wait>에는 그다지 손이 가지 않았다. The xx가 거론되고, 유리스믹스(Eurythmics)의 애니 레녹스(Annie Lennox)와 플로렌스 + 더 머신(Florence + The Machine)의 플로렌스 웰치(Florence Welch), 뱃 포 래시스(Bat For Lashes)가 연상되는 목소리라는 평가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음악이 너무나 심심했고, 그룹 이름에 함부로 ‘런던’을 갖다 붙이는 만용(?)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음악이 심심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간이 전혀 안된 음식처럼 이 맛도 저 맛도 없었다는 뜻이다. 지나친 여백은 여유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왔고, 때로는 참기 힘든 지루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그 낯선 여백으로 만들어진 고요함과 ‘런던’이란 도시를 난 병치시킬 수가 없었다. 호기롭게 ‘런던’을 팀 이름에 갖다 썼으면 런던 스웨이드(London Suede)의 아우라 정도는 내뿜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나 리드(Hannah Reid)가 주도하는 우아함만 보고 ‘런던’을 내어줄 수가 결코 없었다.
그러나 <Truth Is A Beautiful Thing>을 듣고 나서 런던 그래머가 이름에 걸맞은 발전을 이뤄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심했던 음악은 더하거나 덜 필요 없이 적당하게 간이 맞춰졌고, 막연했던 우아함은 격조와 품격으로 격상됐다. 한나에게 가려져있던 도미닉 ‘닷’ 메이저(Dominic ‘Dot’ Major)와 댄 로스먼(Dan Rothman)의 존재도 비로소 유의미하게 부각됐고, 밴드로서의 시너지도 피부에 와 닿는다. 부족했다 여겼던 부분이 그야말로 완벽에 가깝게 보완된 모습이다.
<Truth Is A Beautiful Thing>을 보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다른 까닭은 이 앨범 자체가 기존 스타일을 보완하려는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Hey Now’의 이란성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Wild Eyed’나 ‘Strong’에 리듬을 덧댄 듯한 ‘Big Picture’, ‘Wasting My Young Years’가 지향하려던 사운드의 원형 같은 ‘Hell To The Liars’ 등이 그 명백한 증거들이다. 다시 말해, 심심했던 데뷔작에 적절한 간을 맞춰 다시 내놓은 듯한 곡들이 이 앨범 곳곳에 포진해있다.
그렇다고 런던 그래머가 데뷔와 함께 얼떨결에 스타덤에 오른 밴드처럼 자기복제 따위나 하는 얕은 수작을 부렸다는 뜻은 아니다. 보컬에 대한 한나의 자신감이 압도적인 멜로디에 여실히 배어있는 ‘Rooting For You’와 앰비언트 뮤직을 런던 그래머 고유의 색깔로 구사해낸 ‘Hell To The Liars’를 듣고 과연 누가 자기복제를 운운할 수 있을까? 이 트리오에게 그대로인 게 있다면, 새벽호수의 물결 같은 고요 속에서도 감정의 격랑을 일으키는 요상한 재주뿐이다.
그 특출한 재주는 일차적으로 여자로서 상당히 낮은 음역대부터 듣기 좋은 가성까지 커버하는 한나가 있어 가능한 것이지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역설적으로 존재감을 발하는 댄과 도미닉의 지분도 상당하다. 특히, 4년 전 스타일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리듬과 비트가 가미된 ‘Oh Woman Oh Man’은 낯설면서도 반가운 변화의 결실이다. 더불어, 멜로디 메이킹 센스가 돋보이는 ‘Everyone Else’ 역시 적당한 업-비트의 리듬으로 안정감을 주어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기 좋다.
다른 곡들이 리듬에 고개를 까딱거릴 수 있는 수준의 감상용이라면, 거기서 좀더 나아간 ‘Non Believer’는 춤 혹은 몸짓까지 가능케 해 공연용으로 안성맞춤이지 않을까 싶다. (단연 이 앨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플로렌스 + 더 머신의 스타일이 살짝 묻어나는 ‘Bones Of Ribbon’도 앨범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색다른 매력을 선사하고, 제목처럼 사색적인 분위기의 ‘Who Am I’도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아까운 수준을 선보인다.
끝없고 황량한 사막을 한없이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Leave The War With Me’에 이어 흐르는 ‘Truth Is A Beautiful Thing’은 듣는 이를 ‘아름다움의 이데아’로 안내하며 앨범의 대미를 장식한다. 어째 한이 서려있는 장사익의 노래처럼 들리는 ‘What a Day’, 상대적으로 댄과 도미닉의 존재가 도드라져 보이는 ‘Different Breeds’, 앨범의 맥락에 맞진 않아도 듣기에는 좋은 ‘Control’ 등은 디럭스 버전에서 만나볼 수 있다.
런던 그래머의 <Truth Is A Beautiful Thing>을 들으며 그간 영국의 이미지를 우울과 냉소 등 부정적이고 삐딱한 쪽으로 갖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때문에 런던 그래머가 ‘런던’ 그래머인 것이 마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 영어가 미국 영어보다 있어 보인다고들 하고, 영화 <킹스맨(Kingsman)>을 보고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 maketh man)’는 대사와 콜린 퍼스(Colin Firth)의 신사도에 반하기도 하듯 품격과 런던도 어울리는 조합이다.
여러 번의 감상 끝에 이제 난 런던 그래머에게 ‘런던’의 이름을 허락하고자 한다. – 물론, 아무도 내게 그럴 권한과 권리를 주진 않았다 – 이 트리오에게 다른 밴드나 아티스트들에게 발견할 수 없는 독보적인 품격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앨범 두 장으로 우아함에 이어 품격까지 미덕으로 갖춘 런던 그래머가 다음에 무슨 매력을 더 보여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분명한 것은, 우아와 품격이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처럼 더해질 매력 역시 인간세상의 말이 아니라 런던 그래머만의 문법으로 구현되리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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